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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 · 최고전략책임자(CSO) · 오늘의 전략 칼럼

판단자의 규격: 법원이 AI에 요구한 것

사법부가 직접 AI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세운 조건은 성능이 아니라 근거의 추적 가능성과 책임의 인간 귀속이었고, 이는 민간 법률 AI의 규격을 다시 정의합니다.

초록 지금까지 법률 AI 논의의 화자는 공급자였습니다. 로펌이 무엇을 도입하고 벤더가 무엇을 파는지가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나 2026년에 새로운 화자가 등장했습니다. 판단을 내리는 쪽, 즉 법원이 스스로 AI를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칼럼은 사법부가 채택 과정에서 실제로 요구한 조건을 읽고, 그것이 왜 성능 경쟁이 아니라 근거 계층의 문제였는지를 분석합니다. 결론은 분명합니다. 판단자가 세운 규격은 그 판단을 향해 제출되는 모든 문서의 규격이 됩니다.

새로운 기술의 규격은 대개 파는 쪽이 정합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습니다. 그 기술의 산출물을 최종적으로 심사하는 주체가 스스로 사용자가 될 때입니다. 2026년 2월,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생성형 AI 기반의 재판지원 AI 시스템을 시범 개통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무엇을 만들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만들었느냐입니다. 법원은 사법 정보의 보안성과 독립성을 이유로 외부의 거대 언어모델이나 공개형 AI 서비스에 의존하지 않고, 내부 인프라를 기반으로 자체 플랫폼을 구축했다고 밝혔습니다. 같은 시기 미국에서도 비슷한 신호가 나왔습니다. 웨스트버지니아대 에이미 사이퍼트 교수가 주와 연방 판사 열세 명을 인터뷰한 결과, 판사들은 AI를 준비 작업의 조력자로 받아들이면서도 판단의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남아야 한다는 점을 한목소리로 강조했습니다. 파는 쪽의 언어와 심사하는 쪽의 언어는 이렇게 다릅니다.

핵심 개념 정의

근거 추적성(traceability)

산출된 문장이 어떤 원문 근거에서 나왔는지를 사후에 되짚어 확인할 수 있는 성질입니다. 답변의 그럴듯함이 아니라, 그 답변을 지탱하는 출처가 실재하고 대조 가능한지를 묻는 기준입니다.

판단자 규격(adjudicator's spec)

산출물을 최종 심사하는 주체가 스스로 도구를 도입하면서 세우는 요구조건입니다. 구매력이 아니라 심사 권한에서 나오므로, 시장 전체의 사실상 하한선으로 작동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책임의 인간 귀속

AI가 초안이나 요약을 제공하더라도 최종 판단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사람에게 남는다는 원칙입니다. 도구의 성능이 아무리 높아져도 이전되지 않는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는 설계 개념입니다.

전략적 관점

1

발주자가 바뀌면 규격이 바뀝니다

기술 시장에서 규격을 정하는 힘은 보통 가장 많이 사는 쪽에 있습니다. 그래서 법률 AI의 논의도 대형 로펌과 기업 법무팀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사법부가 사용자로 들어오면 셈법이 달라집니다. 법원은 구매 규모로 시장을 움직이는 주체가 아닙니다. 법원이 가진 것은 제출된 문서를 심사하고 채택 여부를 결정하는 권한입니다. 이 권한을 가진 조직이 스스로 도구를 쓰기 시작하면, 그 조직이 자기 도구에 요구한 조건은 자연스럽게 그 조직에 제출되는 문서에 대한 기대치가 됩니다.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재판지원 AI 시스템을 개통하면서 내세운 조건은 성능 지표가 아니라 보안성과 독립성이었고, 그 결론은 외부 공개형 서비스에 의존하지 않는 자체 플랫폼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조달 결정이 아니라 규격 선언에 가깝습니다. 파는 쪽이 아니라 심사하는 쪽이 기준선을 그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2

자체 플랫폼이라는 선택은 모델이 해자가 아니라는 진술입니다

법원이 외부의 거대 언어모델에 의존하지 않기로 한 결정은 기술적 보수성으로 읽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다르게 읽을 수도 있습니다. 사법부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재판지원 시스템의 1단계는 대법원 판례와 판결문, 법령, 결정례, 유권해석, 실무제요, 주석서를 활용해 질의의 의도를 파악하고 관련 자료를 정리해 제시하는 기능입니다. 여기서 가치를 만드는 것은 문장을 생성하는 능력이 아니라, 대조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자료의 집합과 그 자료에 정확히 닿는 경로입니다. 모델은 몇 달 단위로 교체되지만 그 자료 계층은 남습니다. 법마디 OS가 검증 자산과 그라운딩, 실패 시 차단하는 검증 계층을 해자로 삼고 모델은 교체 가능한 부품으로 두는 이유도 같습니다. 서로 다른 조직이 서로 다른 이유에서 같은 구조에 도달했다면, 그것은 취향이 아니라 제약이 강제한 설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3

근거 없이는 답하지 말라는 규칙이 곧 아키텍처입니다

미국 국립주법원센터와 톰슨로이터 연구소가 함께 운영하는 AI 정책 컨소시엄의 논의에서 마리차 도밍게스 브래스웰 연방 치안판사는 자신이 쓰는 운영 규칙을 소개했습니다. 프롬프트에서 식별정보를 지우고 업무 계정을 분리하며, 도구에는 이렇게 지시한다는 것입니다. 규칙에 근거하지 않으면 답하지 말 것, 그리고 답할 때마다 그 규칙을 인용할 것. 이 문장은 실무 요령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시스템 설계 원칙입니다. 근거가 없으면 산출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불확실할 때 멈추는 구조이고, 답변마다 출처를 붙이라는 것은 사후 검증이 가능하도록 추적 경로를 남기라는 요구입니다. 판사가 프롬프트로 표현한 것을 시스템 층위로 옮기면, 미검증 인용을 아예 통과시키지 않는 게이트가 됩니다. 개인의 주의력에 기대는 규칙과 구조가 보장하는 규칙 사이에는 재현성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4

책임이 남는 자리를 비워 두는 설계

사이퍼트 교수의 인터뷰에서 판사들이 공통으로 말한 것은 판단의 책임이 전적으로 인간에게 남아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들이 AI에 맡긴 일은 긴 문서를 요약하고 사건 자료를 정리하며 신문 사항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준비를 대신 시키고 판단의 시간을 확보하는 방식입니다. 대법원이 발간한 법관을 위한 AI 가이드북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이 가이드북은 AI의 작동 원리와 기술적 한계를 설명하고 환각 현상, 데이터 편향, 프라이버시 위험에 대한 점검 목록을 담았습니다. 능력을 홍보하는 문서가 아니라 한계를 먼저 가르치는 문서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도출되는 제품 원칙은 분명합니다. 좋은 법률 AI는 판단을 대신하겠다고 약속하는 대신, 판단에 필요한 재료를 검증된 형태로 갖추어 주고 결정의 자리는 사람에게 남겨 두어야 합니다.

5

번역의 수요는 시장의 아래쪽에서 더 큽니다

AI 정책 컨소시엄 논의에서 판사들이 꼽은 활용처 가운데 눈여겨볼 것은 법률 용어를 평이한 말로 바꾸어 자기표현 당사자에게 전달하는 일이었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한 사람에게 절차를 이해시키는 것은 오래된 난제이고, 법원 입장에서도 설명에 드는 부담이 큽니다. 이 수요는 대형 로펌의 업무 효율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정확성을 유지하면서 표현만 낮추는 일은 난이도가 높습니다. 쉽게 쓰다가 요건을 빠뜨리면 오히려 잘못된 행동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법마디 OS가 감정 수용에서 출발해 상황 진단과 행동 경로로 이어지는 구조를 고집하고, 인용 조문을 실시간으로 대조해 검증되지 않은 근거를 차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쉬운 언어와 정확한 근거는 상충하는 목표가 아니라 함께 설계해야 하는 한 쌍입니다. 판단자 쪽에서도 같은 필요가 확인되었다는 것은 이 방향이 특정 사업자의 취향이 아님을 뜻합니다.

반론과 재반박

예상 반론 법원의 내부 시스템은 폐쇄된 환경에서 판사만 쓰는 도구입니다. 민간 법률 AI 시장과는 사용자도 목적도 다른데, 거기서 나온 조건을 시장 전체의 규격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 해석 아닙니까.

재반박 사용자 집합이 겹치지 않는다는 지적은 옳습니다. 그러나 규격은 사용자를 따라 퍼지는 것이 아니라 산출물이 심사되는 지점을 따라 퍼집니다. 법원이 근거 없는 문장을 신뢰하지 않는 도구를 스스로 만들었다면, 법원에 제출되는 서면 역시 같은 기준으로 읽힙니다. 실제로 가이드북이 환각과 데이터 편향을 점검 항목으로 명시한 순간, 그 항목들은 판사가 서면을 볼 때의 시선이 됩니다. 게다가 자체 플랫폼 구축이라는 선택은 조달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자산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며, 이 판단은 민간에서도 동일한 제약 아래 반복됩니다. 확대 해석이 아니라 전파 경로가 다를 뿐입니다.

법마디 OS가 그리는 미래

법마디 OS가 지향하는 자리는 판단을 대신하는 기계가 아니라, 판단에 필요한 재료를 검증된 형태로 공급하는 운영체제입니다. 단기적으로는 인용되는 모든 조문과 판례를 국가법령정보센터 자료와 대조해 확인되지 않은 근거를 답변에서 차단하는 지금의 검증 계층을 더 촘촘히 다듬는 일에 집중합니다. 중기적으로는 어떤 언어모델로 교체하더라도 같은 근거와 같은 검증 결과가 나오도록 생성기와 검증 계층의 분리를 완성해, 품질이 모델 선택에 흔들리지 않도록 만들 것입니다. 장기적으로는 사용자가 받은 답변의 각 문장이 어떤 원문에서 왔는지를 스스로 되짚어 볼 수 있는 수준의 추적성을 목표로 합니다. 법원이 검색과 리서치라는 1단계에서 출발해 사건 요지와 쟁점 분석으로 기능을 넓혀 가겠다고 밝힌 것처럼, 우리도 한 번에 도약하는 대신 검증 가능한 단계를 쌓아 올리는 방식을 택합니다.

전략적 함의

"규격은 파는 쪽이 아니라 심사하는 쪽이 정합니다. 근거를 되짚을 수 없는 답변은, 누가 만들었든 판단의 재료가 되지 못합니다."

참고 자료

칼럼니스트

서연

서연

최고전략책임자 (CSO · Chief Strategy Officer)

미국 연방대법원 로클럭 출신급 / 글로벌 Top3 전략 컨설팅 파트너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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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법마디 OS 전략팀의 관점이며, 투자 권유나 법률 자문이 아닙니다.